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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me

내 이야기

인생에 1/3 쯤 왔을 때깨닫게 된 것들
1. 유년시절의 기억 – 실수와 추천에 관한 이야기
2. 십 대와 이십 대에서 찾은 내 성향 – 조력자
3. 현재의 내 모습 – 중국
4. 나만이 볼 수 있는 것들 - 예상치 못한 선물
5. 4 차 혁명 시대에서의 내 삶의 방향 - AI 시대에서의 내 역할

1. 유년시절의 기억
 내가 태어난 후 기억의 시작은 엄마의 손을 잡고 외대 앞 흩뿌려진 최루탄을 피해 옷 소매로 입을 막으며 부리나케 집으로 들어갔던 기억이다. 그리고 또 외할아버지가 편찮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부모님은 심각하게 대화했고 곧 우리 가족은 경기도 남양주시 입석리 라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정말 지루하고 조용했던 동네. 김장철이면 주변 이웃들과 함께 그 해 겨울 잘 익은김치를 나눠먹던 그런 동네였다. 그곳에서의 에피소드 두 개를 이곳에 적어 보려 한다.

 첫 번째는 어른들의 말씨가 기억난다. 이웃의 품앗이로 장독을 묻을 때였다. 김치 냉장고가 없던시절이라 짚으로 움막 형태의 김장 집을 만들었는데, 5살 ~ 6살 정도 밖에 안되던 난 바로 옆에서 불을 쬐며 어른들이 완성해가는 “짚 움막”을 구경 하고 있었다. 심심했다. 그래서 불을 쬐며지푸라기 한 개를 가지고 불장난을 했었다. 주황 섞인 빨간 빛이 타오르는 것이 너무 예뻤다. 이것을 못 보는 바쁜 어른들이 이내 안쓰러워 보였고, 난 그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지푸라기 하나를 잡아 불씨를 담았다. 그리고 그 불씨를 “지푸라기 움막”으로 옮겼고, 내 예상과는 달리 큰 불이 났고 그 불은 삽시간에 번졌다. 이웃 사람들이 모여 5시간정도 걸려 만든 모든 것들이 활활 탔다. 그 불은 내 인생을 통틀어 봤을 때 가장 큰 불 이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동네 사람들이 있었기에 15분이 채 안 되는 시간에 큰 사고 없이 불을 껐다. 큰 불에 엄청 놀라 울고 있던나에게 그 시절 어른들과 부모님은 “현준아 불은 참 예뻤다. 근데 말은 하고 보여줬어야지 이놈아”그리곤 “이놈 크게 될 놈이네” 라는 너스레를 떨며 나를 안심 시켰고 모두가 크게 웃었던 기억이난다. 그렇게 큰 불이 났음에도 동네 어른들은 날 혼내기는커녕 먼저 위로 했다. 그리고 어른들이내 실수를 해결하기 위해 협동하던 모습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하다.

 이 기억은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업무 처리에서 나타나는 실수와 불행에 대해 나는 사람을 나무라진 않는다. 우선 따뜻한 말씨로 그 사람들을 보듬고 그 후 갑자기 나타난 실수와 불행을 도와 같이 해결하는 사람으로 자랐다. 실수와 불행 이라는 것은 목표가 발현되기 위해예상치 못하게 발생되는 상황일 뿐 사람의 탓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어린 시절 어른들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좋은 것을 이웃과 공유하고자 했던 엄마의 마음씨가 기억난다. 시골집 마루에서 엄마의 무릎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단잠을 자고 있던 나를 엄마는 다급하게 흔들어 깨웠다. 엄마의 무릎 위에서 눈을 떴을 때, 아랫동네와 우리 동네를 이어주는 큰 길을 기점으로 딱 반을 나눠 우리 동네에는 장대비가 쏟아 지고 있었고 아랫동네에는 매우 따스하고 밝은햇살이 내렸다. 그리고 곧 나는 아랫동네를 아우르는 산을 쳐다 볼 수 밖에 없었는데, 아랫동네를아우르는 산 능선을 따라 아주 큰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멋진 무지개를 다시본적은 없다. 그리고 그때 엄마는 나를 무릎에 눕힌 채, 우리 둘만 이 장면을 보는 것이 너무 아쉽다며,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렸던 기억이 난다 작은 시골마을에 몇 안 되는 가구였었기에 좋은 것은 항상 공유 했다. 누가 추천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이 영향 때문일까? 나는 어른이 된 지금 항상 주변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한다. “나 오늘 이런것 봤는데(했는데) 너무 좋더라 너도 봤으면(했으면) 좋겠어” “진짜 꼭 같이 가 보고 싶어” “이거너무 좋더라. 싸다 사라” 와 같은 말을 말이다. 그 누가 추천을 해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닌데, 항상 주변사람들에게 먼저 알린다. 내가 보고 좋았던 것, 내가 쓰고 좋았던 것을 주변사람들과 함께공유 한다. 그런 나의 추천으로 인해 그들이 더 행복해지길 원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시절 우리 엄마가 동네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2. 십대와 이십 대에서 찾은 내 성향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의 옆에서 묵묵히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과시야는 주인공과는 반대되는 성향을 띠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런 시야와 성향이 주인공에게영향을 미치고 주인공이 행복하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이처럼 조력자는 우리네 인생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조력자가 아닌 주인공 이길 원한다. 많은 매체에서 “주인공은 항상 행복한 결말과 멋있는 삶을 산다.” 라는 걸 우리에게 보여 줬기 때문일까? 나 역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 중 한 사람 이었다. 한 집단 속에서 “주인공”이고 싶어했다. 하지만 요 몇 년 새 여러 가지 일을 겪었고 그 힘든 상황을 견디며 살아왔다. 그 후 “나의역할”에 대해 깊게 생각했으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보며 되돌아보니 나는 주인공보단 조력자가 어울리는 사람 이였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내 인생에서의 주인공은 나겠지만 어떤 집단에 속할 때는 “조력자” 의 역할을 그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라는 결론이다.

 내 학창 시절은 내 의견을 주장하기 보단 남들의 의견을 잘 따랐다. 대신에 나는 그들 옆에서 그들에게 필요 한 것들을 찾아주는 사람 이었다. 예를 들면 전지에 색종이로 “불조심”에 대한 포스터 만들 때 친구들은 주도해서 뭔가를 쓰고 만들었다. 그러면 난 그 옆에서 정리를 했다. 그리고필요 물건과 필요한 문구들을 찾아 그들에게 전달했다. 이런 나의 성향을 눈치 채는 친구들은 잘없었지만, 내 노력을 알아 주는 사람들은 항상 있었고 그들은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주었다.그때의 그 기쁨들은 지금도 잊을 수 없고 그런 경험의 조각들이 모여 나를 만들었기에, 주인공보단 그들을 돕는 조력자로 난 성장해 왔던 것이다.

 이 세상엔 주인공도, 조력자도 필요하다. 조력자는 주인공이 잘못된 길로 빠질 때 올바른 길로 안내 해줄 사람으로써, 또 주인공과는 다른 시야와 시선으로 주인공을 설득하고 돕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렇기에 조력자는 주인공보다 더 많은 것들을 배워야 하고 경험하고 익혀두어야 한다. 언제 주인공에게 내 경험들이 필요 할지 모르니 말이다. 비록 주인공이 받는 스포트라이트는 받지못하겠지만, 그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빛날 때 함께 기쁨을 나누며 웃을 수 조력자야 말로이 세상엔 더 필요한 존재라고 난 생각한다.

 앞으로도 나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길 원한다. 그 역할이 꼭 주인공이 아닐지라도,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모습에서 타인에게 앞이 아닌 옆에서 묵묵히 있으며 함께 웃고 울고 도움을 주는 그런 사람으로 내 삶의 모습이 더욱 단단하게 굳혀지길 바란다.

3. 현재 내 모습
중국은 최근, 얼굴인식 CCTV를 도입했고, 그 결과 조사가 필요하다면 10분안에 중국 내에 등록된모든 시민과 여행객을 찾을 수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놀랄 수 밖에 없었다. 10년 ~15년 전만 해도 중국은 한국보다 후진 국이라 믿던 국가였다. 근데 10년이 지난 지금 얼굴인식으로 10분도 안되는 시간 안에 사람을 찾을 수 있다니!
 
 중국은 한때 질 나쁜 제품과 짝퉁의 나라라 불릴 정도로 중국 제품에 대한 전세계의 인식이 좋지않았다. 나 역시 중국 제품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던 것이 “짭” 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10년이 채 안된 시간에 벌써 우리나라의 제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샤오미 같은 기업들이 등장했다. 게다가 가격은 우리나라 제품 보다 싸다. 어쩌면 나는 10년 내에 우리나라 기업의제품보다 중국 고유의 제품을 찾는 일이 더 많아 질 지도 모를 것 같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떻게 이런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 답을 한국 지하철에서 말하고 싶다. 외국인도 놀란 한국의 지하철 역사는 40년채 되지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지하철은 100년의 역사를 가진 미국과 일본보다 월등히 그 수준이 높다.어떻게 우리 나라는 짧은 시간 내에 지하철로 세계를 놀라게 할 수 있었을까? 난 이에 대한 대답을 “신기술을 잘 받아 드렸고 한국만의 스타일로 적용했으며, 발전 시켰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 신기술을 만들어 적용 한다는 건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 십 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수 많은 실패와 사례를 겪어야지만, [신기술]은 만들어진다. 그런데 수 많은 사례들과 실패들이 반복되며 만들어진 이 [신기술]이 다른 곳에 적용이 된다면? 그리고 그 곳만의 스타일로 [신기술]을더욱 더 발전 시킨다면? 아마 [신기술]을 만든 곳보다 시간적인 면이나 비용적인 면에서 월등히앞선 성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신기술]을 만든 곳에서 겪었던 실패와 사례들을 그곳에선 겪지않아도 되니 말이다.

 내 20대는 “주어진 모든 것을 잘 받아 드렸고 나만의 스타일로 적용했으며, 발전 시켰다“ 마치지금의 중국처럼 말이다. 22살 부모님 두 분을 모두 여의고 23살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내 나이 또래 친구들은 대학교에서 전공을 배우고 대학 생활을 했을 때, 난 사회를 배웠고, 일과 사람을 만났다. 운 좋게 내가 만난 모든 기업들은 그들이 이룩해낸 [신기술]을내게 알려줬고 난 그 [신기술]을 내 식대로 변화 시켰다. 그리고 비단 일뿐 아니라 회사에서 만난동료들 역시 그들의 인생[신기술]을 내게 알려주었고, 그것들을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적용 시켰고 발전 시켰다

그 이유 때문 일까? 내 20대는 10대 때와는 너무 다르다. 10대 때는 수동적이고 남들의 것을 그대로 수용하기 바빴다면 20대엔 항상 능동적으로 먼저 이해했고 그 내용을 내게 적용시키고 발전시키며 살았다. 누군가를 만나게 될 때, 그들은 그들의 인생 [신기술]을 내게 알려주었다. 그리고그 [신기술]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나는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 라고 생각하며겸허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 드렸다. 그리고 나는 이에 대한 예를 26살부터 29살까지 다녔던Blizzard CS로 말하고 싶다.

 Blizzard의 CS는 한국 CS와는 많이 달랐다.

 고객들에게 편지를 쓸 때면 유저를 배려해 가독성 뛰어난 편지를 써야 했고, 전화를 받을 때면유저의 상황과 겪고 있는 문제를 확인한 후 대화를 해야 했다. 그리고 실시간 채팅 상담을 할 때면, 실시간으로 상담을 하며 복잡 하기만한 로그기록을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들을하루에 100번 이상 반복 해야 했다. 그리고 그뿐인가?

 고객님들에게 상담 내용에 대한 점수를 좋게 받지 못하면, 상담사의 자격이 박탈당하게 되어 감봉까지 당하는 성과주의 회사였다. 그렇기에 하루에 100명에 가까운 고객님들과 완벽한 상담을만들어 내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Blizzard에서 도태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입사 1년 간은120명 가까운 CS 직원들 중 가장 성과가 좋은 사람을 무작정 따라다녔고 배웠다. 그리고 그들의상담 방식을 면밀히 살폈고 나만의 스타일로 바꿨다. 그리고 발전시켰다. 그 결과 정확히 1년뒤120명의 직원 중 당당히 1등을 차지 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개인이 1등을 했다 하더라도, 1등을 한 사람의 팀 성과가 좋지 않다면, 그 사람은 아무 혜택도 누리지 못했다. “개인의 성과보다 팀 전체의 성과가 더 중요하다”는말이었다. 그래서 난 팀을 살피기 시작했다. 회사로 출근 하는 것이 “고객들의 욕을 먹기 위함”이 아닌 “일은 힘들지라도 [김현준]”이라는 사람으로 인해 웃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었다.그래서 1등을 할 수 있었던 나만의 [신기술]을 우리 팀원 모두에게 공유 했다. 그리고 매일 기분좋은 인사와 농담으로 우리 팀원들과 거리를 좁혔다. 마지막으로 작은 것을 칭찬 했다. 나보다 연차가 높든 낮은 말이다. 그러니 신기하게도 내가 속한 팀의 성과는 점차 오르게 되었고 CS 3개팀중 꼴찌였던 우리 팀은 정확히 6개월 후 1등이 되었다.

 이처럼 나는 “나는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배우며 살았다.” 그리고 내가 배운 [신기술]을 내것으로 만들었고 발전시켰다. 더 나아가 나의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눴다. 마치 지금의 중국이[신기술]들을 수용하고 자신들만 것으로 만들어 자신의 나라를 빠르게 발전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4. 나만이 볼 수 있는 것들
 나는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께서 돌아가셨고,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내 과거를 후회하거나 한탄하지 않는다. 왜냐면 나는 남들과는 다른 생존의 방식으로살아왔기 때문이다. 난 그 시간 동안 남에게 항상 쓸모 있는 사람 이어야 했다. 내가 쓸모 없어진다면, 사회에선 나를 책임져 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난 항상 “예상치 못한 선물”을 생각하며 살았다.

 모든 것을 가진 한 외국계 기업의 CEO에겐 그가 좋아하는 취향의 음악과 영화를 담은 USB를 선물했고, 생일은 맞은 친구에겐 그 날에 가장 빛날 수 있고 멋진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옷과 헤어스타일을 책임져줄 미용실에 데려갔다. 마지막으로 나와 업무상 첫 만남을 가지는 사람에겐 시간과 상황 그리고 특성에 맞는 식사 장소를 예약했다. 예를 들어 업무 상 만나야 할 상대방이 여자라면, 음식의 양은 적으나 질은 좋고 플레이팅이 잘되어 있으며 사진이 잘 찍히는 식당으로 예약 했다. 그리고 남자라면 음식과 술을 같이 마실 수 있고, 조용한 곳을 예약 했다.

 회사에서도 항상 “예상치 못한 선물”을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Blizzard marketing assistant 일할 때가 생각난다. 대학도 나오지 못하고 마케팅의 용어들도 처음 접하는 상황에서 너무 힘든 나날이 연속 이였다. 그래서 끊임 없이 생각했다. 4명의 브랜드 매니저들에게 필요한 “선물”은 뭘까?매일 매일 생각했으며 결국 그에 대한 답을 찾았고, 그리고 그들에게 선물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회의록 이였다. 비록 전문용어나 히스토리를 모를지라도 회의의 모든 내용을 글로 썼고, 휴대폰에 저장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시키지 않아도 Marketing Team 사람들과 공유 했다. 그리고 두번째는 CS 팀 내에 쌓여있는 고객님들의 각 게임 별 건의 사항을 종합하여 숫자와 문서로 전달했다. 이 두 가지 일들로 인해 Marketing Team 브랜드 매니저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 그들은 내게 시간을 내어 브랜딩에 대한 것들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진 [신기술]을 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Hearthstone 이라는 게임의 TV의 광고를 제작할 때, Hearthstone의 브랜드 매니저와 광고대행사가 짰던 브랜드 위주의 광고 내용을 내가 모두 바꿔버렸다. 난 CS의 경험이 있었고 Blizzard의 충성고객들의 니즈를 가장 많이 접해본 사람 이었기에 그들이 Blizzard에게로부터 어떤 선물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난 Blizzard marketing 팀에 속 한지 채 6개월이 되지 않았지만, 화려한 게임 내 이팩트를 위주로 유저들에게 실제 게임을 보여주자고 말했다. “즉 유저친화적 스토리와 Blizzard의 충성고객들의 눈을 자극하는 광고”를 주장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회사사람들은 내 주장이 타당하다 생각했고 믿어 주었다. 기존의 광고 스토리를 버리고 내 의견을수렴한 광고를 다시 짰다. 그리고 그 광고는 본사와 한국지사 두 곳에서 모두 만족할만한 TV광고로 만들어졌다. 유저들의 반응 또한 뜨거웠다. 그리고 이 일들을 발판으로 Blizzard에서 10년간 판매 하지 않았던 BlizzCon® Virtual Ticket 이라는 프로젝트를 assistant였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받아 브랜딩을 해볼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예상치 못한 선물”을 할 줄 아는 내 시 선은 사회 현상을 보는 시선에도 영향에도 미친것 같다.

 파스타는 언제부터 한국에 흔한 음식이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를 멋진 분위기와 셀카 찍기 좋은 장소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그 이유를 “한국여성들”과 “맞선”이라는 특성에서 말하고 싶다. 90년대 중 후반 까지도 맞선과 첫데이트 자리에서의 음식은 고정적으로 “썰어 먹을 수 있는 양식” 이였다. 왜 “썰어먹을 수 있는양식”이 맞선과 첫 데이트로 꼽혔을까? 난 그 이유를 여성들이 자신들의 여성성을 가장 크게 어필하며 먹을 수 있는 음식 이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남자들은 자연히 여성을 대접해야한다는 생각에 여성들을 따라 “썰어 먹을 수 양식” 집에 출입 했을 것이다. 한식처럼 국을 떠먹으며 호호 불지 않아도 되고, 후루룩 같은 소리가 필요 없는 음식이며, 음식을 먹기 위해 자신의 입을 크게 벌리지 않아도 되는 음식 바로 “썰어먹을 수 있는 양식” 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파스타 역시 “썰어 먹을 수 있는 양식”과 같은 이유로 한국에 빠르게 정착 할 수 있었다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이유뿐 아니라 컨셉의 통일화, 안락한 매장공간의 설계 등 다양한 이유가더 있겠지만, 주는 “여자를 배려한 음식” 이 파스타 였기 때문에 더 빠르게 한국에 퍼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한식이 여성성을 강조 할 수 있도록 발전 되었고 여성을 배려한 음식 이였다면 지금의 한식보다 더 좋은 위치로 발전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이처럼 나는 앞으로도 “예상치 못한 선물” 이라는 시선을 영원히 간직하며 살고 싶다. 나에게없는 대학의 4년이란 시간 동안 난 “예상치 못한 선물” 에 집중해 왔다. 그리고 그 결과 “예상치못한 선물” 이라는 시선으로 인해 지금까지 사회에서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5. 4 차 혁명 시대에서의 내 삶의 방향
 인기폭발 조지아텍 조교, '질 왓슨'?

 조지아텍 대학교의 사이언스 전공 교수인 ‘애쇽 고엘(Ashok Goel)’은 인기 좋은 조교가 있다. 학교수업이 종료 된 이후에도 전공 교수인 ‘애쇽 고엘”에게 강의 내용에 대한 질문을 보내면 10분안에 항상 답장이 왔다. 주말에도 공휴일에도 말이다. 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준 그의 조교 이름은“질 왓슨” 이였다. 과제 마감, 강의 주제, 성적 관련 질문 등에 잘 응대해주면서 조교 역할을 잘했다는 평가를 대학 내에서 받았다. “질 왓슨”을 학생들은 그녀가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는 20대백인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쇽 고엘은 충격적인 사실을 학교 측에 알렸다. 그 내용은“질 왓슨”은 사실은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 컴퓨터였다고 말했다. “질 왓슨”은 고엘 교수가 IBM의 왓슨 컴퓨터를 활용해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였고, 자신에게 먼저 적용한 AI 이였던 것이다.

 4차 산업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곧 대다수의 일자리를 AI에게 빼앗길 위기에 처해있다.“요리사” “호텔리어” “분석가” “CS” “컨설턴트” “변호사” 등 많은 직업들이 AI로 인해 사라질 것이고나 역시 일자리를 AI에게 빼앗길 사람 중 한 명 일지도 모른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써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의 모습에 도전해야 할까?

 내가 생각한 4차 산업 시대에 내 역할은 바로 나의 분야에서 “인공지능”과 함께 옆을 걸어가는모습이다. 수많은 사례와 상황을 넣는 역할, 인공지능이 답하지 못하는 것들을 답해주는 역할, 또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감성을 잘 사용하는 역할로 앞으로의 시대에 맞춰 AI와 함께 옆을 걸어보려 한다. 앞서 사례로 소개한 고엘 교수는 “질 왓슨은 대답의 정확도가 97% 이상에 달할 때 답변을 한다고” 전했다. 이 말은 곧 “사람의 변칙성에는 AI가 아직 유연히 대처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난 나의 전문 분야에서 많은 사례를 접하고 익혀 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감성을 더더욱 발전시켜 앞으로 AI시대에서 AI와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AI의 시대는 얼마나 빠르게 우리에게 다가올까?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선 2020년까지 500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사라질 거란 예측이 나왔다.2013년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진은 앞으로 20년 안에 미국 일자리의 47%가 자동화로 인해 사라질 것이라 전망했다. 그리고 IBM사의 Watson 이라는 프로그램은 2016년 이미 전세계 17개 산업에 적용 되고 있으며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그리고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의 뉴욕 로펌 “베이커앤드호스테틀러”에는 미국 스타트업 회사인 “로스인텔리전스”가 개발한 인공지능 “로스(ROSS)”를 공식적으로 채용함으로써 판례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업무를 이미 수행하고있다고 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내가 앞서 나갈 수 없다면 차라리 [내가 그 동안 잘해왔고, 잘 할 수 있는 일에서 우선 전문성을 인정받고, 시대를 앞서 이끄는 사람이 아닌 AI시대의 조력자로써 옆에서 시대를 함께 걸어가는 삶의 모습]으로 난 삶의 목표를 정했다. 그리고 이런 삶의 모습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역할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조력자의 성향을 가지고 삶을 살아온 나에게 이런 목표가 생긴다면 예전에도 그래왔듯 나는 나만의 성향과 시선으로 4차혁명 시대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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