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의 일기장(3)-히든카드

직장 밖은 정글이고, 나는 초식동물이더라.

(주)클린그린 / Seonhong Chae

업무 상 알고 지내던 분과 차 한잔 하다가

나중에 퇴사하면,

창업할 거라고 말했다.


뭐할 거냐고 묻길래,

신나게 우리 아이디어를 주절거렸다.


근데 꽤 관심을 가지시더라.


그리고 몇 번을 더 미팅하고

알아보시겠다고 하더라.


그리고 잊고 지냈다.



퇴사하고 두 어달 지났을까?

그분이 연락을 주었다.


혹시 그때 사업 아이템 정리된 거 있냐고.


뭐 틈틈이 정리하고 있고,

다듬고 있는 터라...


미완성이지만 대략적인 초안 정도는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코엑스 근처의 한 호텔에서 보자고 했다.

나름 기대하는 마음으로 정장 쫙 빼입고

다음 날 미팅 장소에 나갔다.


그분은 혼자가 아니라 다른 동행자가 있었다.

자신을 무슨 회사의 대표이고,

무슨 당의 지역위원장이고,

또 어디에 투자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별로 영양가 없는 말의 나열들인데...

그때는 뭔가 엄청난 사람을 만났단 

착각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직장생활만 쭈욱 하다 보니,

그것도 연구실에 주로 틀어 박혀서

외부 미팅은 손꼽을 정도만 했던 나에게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 미팅을 가지고 난 후,

이 기회를 잡아야겠단 초조한 마음에

곧장 사업계획서를 가지고

OO의 모 대학교 교수님과 미팅도 가지고,

몇몇 업체들과 접촉하였다.


사실 설익은 계획서였고,

더 차근차근 준비해야 할 부분이 많았는데....


뭐가 씌었는지...

이성적인 판단보다

조급한 마음이 너무나 컸다.


그리고 그 사업계획에 가장 핵심이 되는

Raw data와 비용, 장소, 컨소시엄 주체,

핵심인력의 정보 등을 의심 없이 전해주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사업수행이 어렵다는 연락이 왔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사업이라는 게 그렇지,

우리 자체적으로도 이 사업계획에 대하여

쉽지 않고,  부족한 게 많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에...


쉽게 인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그런지 

또 잊고 지내고 있었다.




시간의 순서대로 보면,

우리 동료들과 중국 허난 성에 상주하며

중국 쪽에서 사업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네이버를 통해 알게 된 한국 소식!


우리가 사업 계획하였던 사업에 대한 뉴스였다.


OO시에서 XX과 **기관과 컨소시엄으로

##의 투자유치로 사업이 시작되었다는....


여기서 지역과 컨소시엄 주체, 사업내용 등에 대한

모든 내용이 우리의 사업계획서와 정확하게 일치하였다.


게다가 그 컨소시엄에는 눈에 익은 분이 계셨다.



처음에 우리 팀은 멘붕이었다.

그리고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우리 뒤에서 일이 진행되고 있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간 쓸개 다 내어줄 것처럼

요청하는 자료와 피드백을 

몇 날 며칠을 고생하며 제공하였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는데...


순진하게 속았구나.

고스란히 빼앗겼구나.




우리의 히든카드라고 믿었던 아이템이 

그렇게 날아가버리고,

우리 팀의 분위기는 절망의 나락에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사실 그건 우리의 바보 같은 핑계였다.


우리에게는

사업계획서대로 진행시킬 능력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었기에

그 사업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먼저 우리 자신의 처지를 냉정하게 보자면,

어느 누구라도 우리랑 같이 하고 싶지 않았을 테다.


회사 설립도 안되어 있었고,

자본도 없고, 

능력을 검증할 수 있는 레퍼런스도 부족하고....


단지 사업계획서와 데이터들만 가지고 있는

철부지 허당인 퇴사자들이었다.


오히려 그분들이 그 사업계획서와 데이터를

잘 활용하여 현실 구현하였다고 생각된다.


우리였으면, 그렇게 못 했다고.

우리가 아니었으니까 잘 된 거라고...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기까지....

좀 힘든 시간들이 있었지만...

그 덕분에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1) 우리가 준비 안 되어 있으면, 나서지 말 것!

2) 사업계획보다 실행력이 더 중요하다.

3) 항상 역지사지! 사람을 만날 때, 역으로 생각해보자

4) 우리가 정글에 있고, 우리는 초식동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5) 토끼는 굴을 3~4개 따로 파 놓는다(히든카드와 대안책을 미리 준비해 놓자)

6) 배우고, 익히고, 학습하자. 그것만이 우리가 정글에서 살아남는 길이다.



어쩌다 그 사업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그러나 배가 아프거나, 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별 볼 게 없던 사업계획서를

멋지게 성공시킨 그분들에 대하여

존경심과 감사함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믿는다.

우리가 잃은 것은 달랑 계획과 약간의 시간이고


우리가 얻은 것은 

우리의 현 위치와 약점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과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남는 장사였다고.


비록 당시에는 쓰지만 약이 되어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고 자신할 수 있다.

기업문화 엿볼 때, 더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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